어릴 때부터 냉면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좋아했던 건 칡냉면. 빨간 국물에 검은 면의 자극적이고 질긴 맛이 좋았었다. 평양냉면을 처음 맛본 건 11-12년 쯤이었다. 어디선가 얘기를 듣고, 학교에서 가까운 을지면옥을 혼자 찾아갔었다. 보통 첫 맛에는 '잉 이게 뭐야?' 한다는데 난 첫 맛부터 '이거다' 싶었다. 그 후로 서울 여기저기 평양냉면을 찾아다녔다.
그 때와 비교해서 냉면값은 30퍼센트 이상 오른 것 같다. 을지면옥이 처음에 8천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1만 1천원이니 30퍼센트 이상 오른 셈이다. 물가 상승보다는 쭈욱 올라온 평양냉면의 인기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 어째 점점 먹기 부담스러운 음식이 되었다. 예전 같으면 여름이고 겨울이고 '아 냉면 하나 먹고 갈까' 했던 게 요즘은 '돈 좀 아껴야지'라는 생각에 지고 만다. 궁리를 해보다가 정당하게 냉면을 먹을 방법을 찾았다. 블로그에 평양냉면 시리즈를 올리자. 가서 맛도 엄밀히 평가하면서 이것저것 비교해보고 사진도 찍고 오자. 이전에 찍어둔 사진도 있지만, 한 번 가고 안 간 곳도 있고 보통 음식 사진 밖에 안 찍었으니깐.
미슐랭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단다.
그런 핑계로 시작하는 전적으로 내 주관대로인 평양냉면 시리즈 첫번째 포스팅은 봉피양이다. 을지면옥과 봉피양 중 어디를 먼저 해야하나 고민했다. 을지면옥은 가장 좋아하는 곳, 봉피양은 가장 자주 가는 곳. 그리고 결국 더 가까운 봉피양에 갔다. 가장 자주 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사실 주로 가는 강남점이나 잠실 롯데백화점 지하에 갈까 했다. 그래도 포스팅을 마음먹고 먹으러 가는 것이니 본점에 갔다. 내가 처음으로 봉피양 냉면을 먹은 곳이기도 하다. 파리에서 돌아오는 날, 잠실에서 어머니를 만나 바로 벽제갈비에 갔다. 고기를 맛있게 먹고 나온 봉피양 순면. 6개월간 타지 생활을 하며 이런저런 이유에 몸도 마음도 지쳐있는 상황에서, 최고의 힐링이었다. 그 진한 국물이 인상적이었다.
봉피양 방이점은 벽제갈비와 봉피양 본관 + 별관 + 신관 총 4개의 매장이 있다. 봉피양의 장점 중 하나는 어디서 먹으나 비교적 일관적인 맛이라는 것이다. 본점도, 분점도, 백화점 지하 매장도 별 차이가 없다. 을밀대의 경우 본점 - 강남점 - 잠실점의 차이가 현저하다. 잠실점은 못 먹어줄 정도였다. 역삼점은 가까운 데도 가볼 생각도 안 했다. 멀리 떨어진 매장도 그 정도로 일관적으로 품질을 유지하니, 본관이든 별관이든 신관이든 상관없을 것 같다. 난 본관에서 먹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아주 핫한 음식이 되었는데, 여름의 열기까지 겹쳐 대기줄이 상당히 길었다. 30분 이상 기다린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대기열에 에어컨도 틀어주고 기다리기 불편하진 않았다. 입구에서부터 봉피양의 메뉴판과 소개를 볼 수 있다. 난 여기서 물냉면과 순면, 거냉 밖에 안 먹어봤다. 결국 다 물냉면이다. 비빔냉면, 설렁탕, 떡갈비 등 메뉴가 더 있긴 한데 별로 땡겨본 적이 없다. 애초에 냉면을 먹을 각오로 봉피양에 방문하니.
냉면은 금방 나온다. 본점의 특이한 점은 육수 만들 때 사용한 편육을 서비스로 내어준다는 것이다. 다른 지점은 그런 거 없다. 그리고 원래 반찬도 무절임 밖에 안 나온다. 맨 오른쪽에 김치는 내가 따로 요청한 것. 저게 아주 별미다. 냉면에도 들어가있다. 무절임도 슴슴한데, 김치는 꽤 짭짤시큼하다. 비교적 맛이 진하고 풍부한 봉피양이지만 그래도 허전한 감이 있다면 김치와 함께 먹으면 자극에 만족할 것이다.
1. 국물
평양냉면의 본질은 국물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면도 중요하다. 하지만 면이 베이스라면 국물은 드럼이다.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 평양냉면을 처음 먹었을 때 사람들이 낯설어하는 게 국물이다. 흔히 알고 있던 '냉면'은 대개 MSG의 자극적인 맛이 아주 강하니깐. 사실 그 '냉면'과 이 '냉면'은 동음이의어 정도에 불과한데, 기존에 머릿 속을 지배하고 있던 그 '냉면'의 기억과 부조화가 일어난다고 난 생각한다. 거기에 비교적 밍밍한 맛이 MSG의 자극에 익숙해져 있는 혀에 거부감을 주는 것이고. 봉피양의 냉면은 그 거부감이 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물 사이사이에 꽉 차있는 고기의 맛은 이 냉면이 그 냉면과 다른 것을 알게는 해주지만, 혀와 코에도 충분한 자극이 된다. 흔히 말하는 '맛있다'는 관념에 봉피양의 국물은 충분히 부합한다.
참고로 거냉이란 것도 있다. 거냉은 냉기를 제거했다는 뜻이다. 미지근하다. 거냉의 장점은 그 집 냉면 본연의 맛과 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것. 근데 개인적으론 찬 음식을 좋아해서 첨에만 함 먹어보고 다음부턴 찬 걸로 먹는다. 한번쯤 먹어볼만 하다. 그게 취향인 사람도 있을 테니.
2. 면
다음은 베이스에 해당하는 면. 봉피양의 또 다른 특이점은 메밀 100%의 순면이 존재한다. 다만 비싸다. 무려 1만 7천원이다. 그래서 난 그냥 냉면을 시켰다. 물론 이것도 1만 4천원으로 비싸다. 작년보다 1천원 또 올랐다. 그냥 냉면은 메밀 80%와 밀가루 20%라고 한다. 그래도 메밀 함량이 높다. 그래서 이빨로 툭툭 끊어진다. 사실 어느 평양냉면집이나 다 그렇긴 하지만. 두툼하고 메밀향이 강한 편이다. 면에도 거뭇거뭇한 메밀껍질들이 박혀있다. 원래 메밀도 하얀 게 맞다고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 여튼 비주얼적으로는 진짜 제대로 메밀을 쓰는 집이란 느낌이다. 순면이랑 비교하면 훨씬 정제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 순면은 정말 메밀향이 확 느껴지고 거친 반면, 일반면은 좀 더 사회화, 도시화된 느낌.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기보단 그 때 그 때 땡기는 느낌이 있다.
3. 사이드(반찬, 고명, 면수 등)
봉피양의 사이드메뉴들. 본점은 여기에 편육이 추가된다. 근데 편육은 정말 서비스라, 조기소진 되면 못 먹는다. 무절임은 슴슴하다. 식사 기다리면서 이것만 계속 먹고 있어도 좋다. 김치라 해야하나 짠지라 해야하나, 고춧가루 안 쓴 배추절임은 아주 개성있다. 어디서 못 먹어본 것 같다. 봉피양의 냉면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우래옥의 김치가 냉면에 있어서는 남의 집 자식 같은 데에 비해, 이 배추절임은 누가 봐도 봉피양 냉면의 자식이다. 다만 따로 주문해서 먹으면 꽤 짜다. 냉면의 슴슴한 맛을 즐기려면 냉면에 들어있는 배추절임이 적절하다. 특히 편육에 무절임 한 점 배추절임 한 점 같이 먹는 게 엄청난 맛이었다. 새우젓도 안 주고, 편육도 맛이 많이 빠져 향만 남았는데 두 반찬이 허전함을 채워준다. 사이드메뉴의 굳이 단점이라면 면수를 안 준다는 것. 면수 먹으면서 기다리는 재미가 쏠쏠한데.
4. 기타(분위기, 교통 등)
가격부터 알겠지만 봉피양은 고급음식점이다. 벽제갈비는 1인분에 6만원이 넘는다. 그런 집의 냉면이다. 그래서 분위기도 깔끔하니 좋다. 모든 매장이 다 따뜻한 분위기. 당연히 서비스도 좋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봉피양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접근성이다. 송파 강남에만 6개, 그리고 판교와 정자에 있다. 이 정도면 나한테는 언제든 먹을 수 있는 평양냉면이다. 돈만 많다면. 강북 쪽에도 여러 개 있다. 그리고 각 매장별로 맛의 차이가 크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음식의 기준에는 맛도 중요하지만,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 그 점이 내가 봉피양을 높게 평가하고 가장 먼저 포스팅한 이유. 맛도 대중적, 접근성도 대중적이다. 가격은 안 대중적이라는 게 단점이긴 하다.
잘 먹었다.
국물 |
★★★★☆ | 진한 국물. 하지만 다른 첨가물이 들어가는 것 같단 기분도 든다. |
면 |
★★★★☆ | 두툼하니 끊는 맛이 좋다. 순면/일반면 고민하게 하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 |
사이드 |
★★★★☆ | 다른 데에서는 맛볼 수 없는 배추절임 최고. |
기타 |
★★★★★ | 딱히 고급스러운 걸 선호하진 않지만, 높은 점수를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
총평 |
★★★★☆ | 돈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봉피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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